책 소개
<빈곤 과정>은 빈곤에 대해 오랫동안 탐구해 온 문화인류학자 조문영 선생님의 책이다. 이 책이 나온 지 벌써 2년이 지났는데, 학술서임에도 불구하고 두 달 전 6쇄를 찍었다.
단편적으로나마 이 책을 소개하고 싶은 건 여전히 내 안에서 해결되지 못하는 질문들을 던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인류학과 인류학 저술이 나에게 주는 깊은 울림을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 울림은 학문이 탐구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서문에서도 그런 태도를 느낄 수 있다.
빈곤에 대한 내 오랜 관심이 언제부터였을까 더듬다 보면 어렴풋한 장면이 떠오른다. 1980년대 중반 서울 목동이다. … 급우들이 1000원씩 모아 문집을 만들기로 했는데 방학이 되어도 돈이 다 걷히지 않았다. 수금을 빙자해서 몇몇 친구가 사는 목동을 찾았다. 버스를 타고 목동오거리에서 내려 얼만큼 걸었을까, 매캐한 먼지 사이로 아수라가 펼쳐졌다. 분진에 뒤덮인 소쿠리, 골목에 나뒹구는 냄비, 아이의 울음, 엄마의 통곡, 철거반원의 욕설이 뒤엉킨 그날의 경관은 뿌연 잔해로, 선명한 충격으로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한국 민주화 운동과 도시 빈민운동의 굵직한 역사로 ‘목동 철거반대 투쟁’을 배운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였다. 제집 세간살이가 낯선 이의 손에 들려 길바닥에 하찮게 내던져지는 순간을 대면한 사람, 그런 모멸의 순간을 살면서 거듭 경험한 사람의 마음을 가늠할 자신은 여전히 없다. 그렇다고 당시의 충격이 나를 단단한 저항자로 성장시킨 것도 아니다. 이후에도 목동은 여러 번 나의 세계에 등장했다. ‘목동 신시가지’로 이사 간 친구들을 부러워했고, 대학 시절 목동에서 과외를 하며 등록금을 벌기도 했다. 그러다 가령 공부방 교사를 하던 봉천동 재개발 지역에서 철거 폭력이 자행되는 경관을 마주했을 때, 일을 마치고 아내의 노점에 들러다가 단속반원들의 행패에 팔다 남은 붕어빵이 길바닥에 흩어지는 걸 본 이튿날 스스로 목을 맨 이근재씨 이야기를 뒤늦게 접했을 때, 30여 년 전 감당하지 못했던 당혹감이 재차 엄습했다.
빈곤이란 화두 앞에서 나는 여전히 모순투성이로 살아간다. 하지만 냄비와 붕어빵이 나뒹구는 자리에서 동료 시민으로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단 걸 가르쳐준 사람들, 함께 고민하며 내딛는 반보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사람들 덕택에 연구를 수행하며 초연한 관찰자로 남기보다는 참여자-연루자의 감각을 조금이나마 벼릴 수 있었다.
내가 처음 선생님에 대해 알게 된 건 10여년 전인데, ‘빈곤’이라는 주제를 연구한다는 게 그저 신기했다. ‘빈곤’은 떨쳐내고 싶거나 극복하는 것이지 깊이 파고들고 싶은 주제는 아니었다. 그런 빈곤을 20년이 넘도록 연구한 연구자에게 남은 경관들은 어떤 것들이었는지, 서문을 보고 처음 알았다. 인간성이 훼손되는 사건들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매번 우리를 ‘단단한 저항자’로 성장시키지는 못하지만 어렴풋하고 가느다랗게, 끈질기게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번민하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배경 쌓기: 문화인류학
문화인류학자들은 특정 지역 또는 공동체 내에서 관찰과 참여관찰을 통해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분석해서 인간 행동의 패턴과 그 배후에 있는 의미를 탐구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종종 무시되거나 잘못 이해된 문화적 실천들을 발굴하며, 이를 통해 더욱 포괄적이고 다양한 담론을 만든다. 즉, 문화인류학은 실제로 사람들의 삶을 다루고, 그 삶의 이야기로부터 사회와 문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통찰을 발견하는 학문이다. 실제 사람들의 삶을 다루는 만큼 그에 대한 책임감 뿐만 아니라 모종의 ‘연루됨’이 중요하다. 문화인류학에서 ‘참여관찰’이라는 일견 모순된 방법론을 사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떤 집단이나 사람의 삶에 ‘참여’한다는 것과 거리를 둬야만 가능한 ‘관찰’이 어떻게 동시에 가능할까? 나는 여전히 불가능의 영역, 일종의 예술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불가능의 영역에서 분투한 사람들이 만드는 통찰과 성찰은 우리의 머리와 마음을 모두 깊이 울린다. 이런 울림은 우리가 속한 세계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존중을 만들어 낸다.
책의 여정 따라가기
저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빈곤’의 의미를 확장하는 여러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다룬다. 개념적이고 철학적인 차원에서, 실제 인류학 기술지에서 사람들의 삶으로, 그리고 저자가 가장 가까운 부근에서 만난 학생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리고 서문에서 볼 수 있듯 본인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까지. 사람들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대부분은 발췌할 수 없는 흐름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빈곤’의 개념적 차원을 다루는 책의 여정만 커버한다. 초입에서 저자는 ‘사회’와 ‘빈곤’의 탄생을 함깨 소개 한다.
가난은 동서고금의 현상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이를 ‘빈곤’이란 개념으로 문제화하고, 이에 개입하기 위한 대상으로서 ‘빈민the poor’을 구성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다. 유럽에서는 중세 말엽부터 …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남루한 사람들의 무리와 그 집합적 삶의 양태를 ‘사회’라는, 개인과 국가를 매개하는 영역으로 새롭게 포착하고, 빈곤과 빈민울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 사회의 발명 또는 발견은 통치에 관한 새로운 사유의 출현을 수반했다. 가난한 아이에게 교육이 필요한 것은, “우리가 그 아이에게 동정을 느껴서가 아니라 그 교육이 사회에 좋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회’라는 개념이 어떻게 ‘빈곤’을 통치하고 부정적인 의미를 구조화 하는 건 ‘의존성’과 연결된다. 어떤 의존은 결함으로만 해석된다. 가난한 사람의 의존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의존의 부정성은 제한적 의미의 ‘노동’을 척도로 한다. 자본주의 체제 노동자 기준에 미달하거나 노동자이기를 거부하는 품행 전체를 빈민적인 것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노동할 수 있는지 여부’는 근대 빈곤 통치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다. 사회주의 중국조차 공산주의의 ‘필요에 따른 분배’원칙 대신 ‘노동에 따른 분배’를 택했다.
저자는 이러한 의존성의 부정성을 새롭게 의미화 한다. “의존의 네트워크가 없다면 당신은 아무 존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 사실 삶에서 의존만큼 당연한 행위도 없다. 갓 태어난 아기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몸이 아플 때, 죽음에 더 가까운 나이가 되었을 때 돌봄은 간절하다. … 추울 때 옷 입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행동이 바로 의존이다. 건장한abled 성인이라고 의존에서 자유로울까? 그의 삶이 의존과 무관해 보인다면, 이는 살면서 의존할 기회와 자원이 누구보다 그에게 넉넉했음을 뜻한다. 그가 독립적이라 느낀다면, 자신의 의존 경험에 무심했던 까닭일 확률이 높다. … 함께 살아가기 위해 서로의 존재에 기댈 수밖에 없다면, 우리 과제는 ‘독립’이 아닌 ‘상호의존interdependence’이어야 한다.
심지어 ‘“누군가임being someone”은 “누군가에 속함belonging to someone”과 긴밀이 조응한다.’는 이야기는 의존 대신 독립을 당연히 더 나아지는 것, 더 좋은 것으로 내재화 한 우리에게 어떤 안심을 만들어 준다. 이어서 저자는 우리가 인식하고 있지만 쉽게 언어화 하기 어려운 빈곤의 확장된 의미를 명확히 이야기 해준다.
분노를 느끼지 않고, 체념하고, 반항하지 않는 태도를 갖게 된다. “자신의 고통을 공적으로 문제 삼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빈곤을 단순히 낮은 수준의 소득이 아닌 “기본적 역량”의 박탈로 정의한 이유다.
어떤 의미에서는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삶에서 조금씩 ’빈민됨’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구절이었다.
지금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지금, 빈곤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나 역시 쉽게 찾지 못해 2년 간 미뤄왔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니 이 책을 읽어봐야 하는 수 많은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최근 몇 년간 수저론, 공정, 평등이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었다는 것이다. 거의 모두가 공정과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냉소적이고 체념하는 태도, 이야기가 압도해 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빈곤에 대한 긴 연구와 담론을 접하면서 이런 사회를,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를 이해하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다른 태도를 만날 수 있다.
불평등이 만인의 언어가 되고 겹겹의 불안이 다수의 ‘피해자’ 선언을 부추기는 시대이지만, 그럼에도 어떤 생명은 다른 생명보다 훨씬 더 취약하다. 폭우가 도시를 삼켰을 때 어떤 운전자는 물에 잠긴 승용차 때문에 골치가 아프지만, 어떤 인간은 반지하에서 속수무책으로 주검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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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이 더는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며 과거 중산층이 향유했던 고용구조의 안정성이 더는 지속될 수 없을 만큼 불안정한 삶이 “구조화”됐음을 인식하고, 빈자에 대한 빈자의 적대를 부추기는 통치에 편승하기보다 ‘우리’ 모두 이러한 통치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공통 감각을 형성하는 일은 전혀 간단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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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의 공론장이 동료 시민을 머나먼 이방인, 두려운 괴물, 가망 없는 주류로 쉽게 거부하지 않고 지구 속 취약하고 불완전한 (나와 같은) 존재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기를 바란다.
책을 읽으며 어떤 이야기, 누군가의 이야기는 듣고 싶어하지 않았던 내 모습을 돌아보기도 했다. 선거가 끝난 뒤 많은 생각이 드는 요즘, 거부하고 싶은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마음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