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우선 나는 날마다, 하루 종일 평온함을 느꼈다. 아주 깊은 평온함이었다. 이 평온함에서 나는 내가 평소에는 매일같이 신경계에 스며드는 질 낮은 불안을 견디고 있었으며, 아마도 수년 동안 그 감정을 계속 품어왔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 그 평온함과 함께 나는 내면이 말끔해지는 걸 느꼈다. 마치 푸른색과 흰색으로 된 거대한 파도가 나를 샅샅이 헹궈 모래를 씻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 그러자 언제나 내 머릿속을 조각조각 떠다니던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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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바닷가 마을에 와 있다. 아침에는 모래사장을 산책하다가 아직 너무 차갑지 않은 바닷물에 발을 한참 담구었다. 신나는 마음이 된 채 들어와 바다가 보이는 창을 앞에 두고 책을 읽다가, 근처 동네 책방에 들러 책을 사고 점심을 먹었다. 더 늦은 오후에는 아무리 밟아도 잘 나가지 않는 자전거를 번갈아 타면서 해변가를 달리다가 숲을 봤다.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기 전까지 혼자 방에서 일을 하고 엽서를 썼다. 해는 금새 졌다. 차갑고 어두운 교외의 공기를 뚫고 수다스럽게 회를 사와 먹었다. 잠시 잠이 들었다 깨서 별을 보고 일출을 기다리며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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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상에 기동성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대중교통으로 이동을 해결할 수 없는 서울 밖으로 잘 떠나지 않는다. 못한다. 실제로 운전 면허가 없기도 하지만 심적으로도 기동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루틴이 있는 생활을 깨는 것 자체가 힘에 부쳤다. 어딘가 떠났다 돌아오면 생기는 여독이 찐득거리며 내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기분도 싫었다. 일상이 침해된다고 느꼈다. 또 여행에 가서 갑자기 결정해야 하는 일들이 생기는 것, 돈이 드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보통 내가 원하는 휴식의 모습은 평소에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것, 예를 들면 낮 시간에 ‘할 일 없이’ 카페에 가서 ‘진짜 커피 마시기'(다른 할 일을 위한 카페인 섭취가 아니라 온전한 커피 그 자체를 마시는 행위) 같은 것이었다. 일상에서 해야할 일에 서둘러 지나치는 시간과 공간을 온전히 누리는 것 정도로 충분했다. 여행은 어떤 인생의 챕터가 완전히 마무리 되어 나 자신에게 부과한 책무가 없는 시기에 가능한 휴식이었다. 예를 들어 졸업이나 이직 같은 이벤트에 맞춰서 말이다.
책무가 없는 상태가 자주 찾아오지 않는, ‘이벤트’처럼 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함께 여행 온 친구 역시 내가 아마 여행을 일상에 끼워넣지 못한 건 많이 지쳐있었기 때문일 거라고 말했다. 평소에 시달린 자신을 쉬게 하려면 ‘익숙한 곳에서’, 대체로 ‘가만히’ 있는 것이 일종의 최선이었다. 가령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 가만히 앉아 좋은 식사를 한다든지, 좋아하는 미술관에 가서 가만히 좋은 자극을 받는다든지..
지금처럼 일이 아주 바빠지려는 시기를 코 앞에 두고 갑자기 떠난 적은 없었다. 이런 시기에 잠시 떠나 다른 공기를 마시고 처음 보는 길을 산책하는 게 은은한 불안을 잠재워준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런데 매일 같은 자리를 맴돌며 쉬는 것도 너무 오래 반복하니 휴식이 되지 않았다. 의무와 불안은 내가 지든 지지 않든 늘 거기에 있다. 잠시 벗었다가 다시 져도 된다는 걸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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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바다에서 발을 담구고 파도를 바라보는 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 같다. 그 시간 동안 ‘내면이 말끔해지는 걸 느꼈다.’ 비비언 고닉이 쓴 비유는 진짜였다. ‘푸른색과 흰색으로 된 거대한 파도가 나를 샅샅이 헹궈 모래를 씻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평온해졌다. 사소한 걱정과 늘 어딘가 스며있는 불안, 매일 보는 풍경과 얼굴들, 혼자 분투해야 하는 시간 사이사이 SNS를 뒤적거리는 형식의 휴식과 다시 거기서 오는 피로감. 그런 일상의 노이즈가 여러 겹으로 지직거리던 게 꺼지고 고요한 파도 소리만 남았다.
이렇게 온전한 휴식 사이에도 순간순간 혼자만의 시간이 찾아온다. 갑자기 사람들 생각에 골몰하거나, 일상 속 일들을 생각하다 마음이 다시 휴식에서 멀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휴식이라는 게 이런 걸까? 그런 시간이 나를 불안하게 하기 보다는 가만히 나를 보듬는 느낌이 든다. 내면을 샅샅이 파헤치지 않으면서 나의 상태에 깊이 집중할 수 있다. 여전히 새로운 경험이 삶에 남아있다는 게 큰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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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마치니 눈 앞에 일출이 이미 시작되었다. 경이로운 모습에 눈물이 난다. 변화무쌍하고, 조금 무섭고, 거세면서 아름다운 바다의 경이로움. 이런 순간을 더 많이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함께 이 시간을 만든 친구에게도 고맙다.
덧붙여 지난하고 뿌듯한 시간을 뒤로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이 책을 선물해 준 또 다른 친구에게도 고맙다. 그녀에게 파도같은 휴식, 경이로운 삶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