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운 설명서가 필요하고, 상세한 가이드가 있어야 한다면 서비스 디자인이 잘못된 것이다. 정부 서비스도 서비스의 일종이다. 쓰기 쉬운 정부가 시민에게 좋은 정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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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빅(civic)’이란 도시, 시민, 시민권과 관련한 모든 것들을 뜻한다. ‘테크(tech)’는 말 그대로 기술이다. ‘시빅 테크’는 그래서 시민의 삶을 더 낫게 하는 기술 및 문제 해결과 관련한 모든 것을 뜻한다. 쉬운 예를 하나 들자면 대형 포털 등에서 만들기도 전에 시민 개인이 만든 Covid-19 현황 사이트는 누구나 사용해봤을 익숙한 시빅 테크다. 비슷하게 시빅 데이터도 마찬가지로 시민의 삶을 더 낫게 하는 데이터 활용 및 문제 해결을 통칭한다. 뉴스타파에서 만든 공직자 재산 정보도 시빅 데이터, 시빅 테크라고 할 수 있다. 코드 포 아메리카와 같이 시민 개인이나 특정 단체가 아니라 정부와 직접 협력하는 단체도 있다.
핀테크가 금융 서비스 영역에서 개인이 느꼈던 짜증과 불편을 혁신으로 만들어주었다면, 공공서비스 영역에서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시빅 테크다. 시빅 테크는 기술을 통해 시민과 정부의 관계를 재정의한다. 시민이 정책 결정 과정에 더 쉽게 참여하고 그 혜택을 더 많이 누리도록 돕는다. 정부 웹사이트, 모바일 앱을 이용해 공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온라인 쇼핑몰에서 간편결제를 하는 것처럼 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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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 즈음이었던 2010년 대 초중반에 전세계적으로 이 시빅 테크 활동이 많아졌다. 당시 나는 사용자 중심 디자인 사고법을 시민과 사회적인 가치로 치환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문제 해결을 하되 그것이 돈을 지불하는 ‘고객’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의 모든 혹은 특정 ‘구성원’을 위한 것이면 더 재밌고 의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민+기술이라는 개념에 매료됏고 관련 조직에서 잠시 일을 했다. 반 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해외의 사례를 연구하고 참고하면서 한국에서는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끝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한국 상황에는 잘 맞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지금 생각나는 가장 큰 문제는 아래 두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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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되어 있거나 좋은 품질의 데이터를 얻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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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이나 사회적 문제와 관련된 활동을 할 때 쉽게 진영 논리로 이어져버려 다층적인 논의를 하기가 어렵다.
<우리에게는 다른 데이터가 필요하다>도 한국에서 데이터를 활용하기 어려운 인프라 문제에 대해서 많이 다룬다. 데이터라는 것은 결국 과거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서부터 재정리를 해야할 지 잘 감이 오지 않는다. 혹은 미래를 위해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기준을 만들어서 쌓기 시작해야 할텐데, 그 방대한 작업의 이니셔티브는 누가 가져가야 할까? 아마도 정부에서 전문적인 역량을 충분히 확보한 뒤 아주 긴 시간을 바라보고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얼만큼 인지하고 있을까. 정부에게도 이 문제는 무척 중요할텐데 말이다.
영어 단어 통계statistics는 18세기 독일어인 ‘슈타티스틱statistik’에서 유래했다. … 통계가 역사에 처음 등장했을 때 이 단어가 가진 뜻은 국가state가 알아야 할 정보였다. … 정부의 이상도 국민의 머릿수를 제대로 세지 못하면 실현하지 못한다. 결국, 현대 민주주의 정부의 권력은 데이터로 표현된다. … 인구통계는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이자 지극히 ‘기술적’인 문제다.
2015년, 최초의 미국 CDS(Cheif Data Scientist) 역할을 맡았던 DJ 파틸은 링크드인, 페이팔, 이베이와 같은 테크 기업에서 일했다. … 미국의 1세대 데이터 과학자들 중에서 파틸과 같이 정부에서 일했던 배경을 가진 이들이 흔하다. 그 이유는 인터넷 기업이 등장하기 이전에 대규모 데이터의 수집, 정제, 분석이 가능했던 유일무이한 단체가 정부였기 때문이다.
위 두 가지 문제 뿐만 아니라 ‘고객’ 대비 ‘구성원(시민)’이란 타겟은 범위가 너무 넓고 이해관계가 복잡하다는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자원을 쓸 수 있는 조직이 있고, 그 조직에서 지속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다면 매 번 집중할 수 있는 문제 정의의 크기가 좀 더 작아져 타겟도 좁아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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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열렬히 관심을 가졌지만 더 이상 파고 들기를 포기해버린 주제를, 더 오랜 시간 충분히 파고든 사람의 책을 읽으니 좋았다. 하지만 책을 다 일긍ㄴ 후에도 여전히 한국에서는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저자도 미국에서 계속 활동을 할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내 회사에 돈을 지불한 고객’이라는 타겟은 어딘가 좁게 느껴진다. (그 타겟을 충분히 만족시키고 있지도 못하지만..) 내 마음에 열정을 만들고 더 에너지를 쏟고 싶은 마음은 왜인지 자연스럽게 좀 더 넓은 타겟인 사회 구성원,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일로 향한다. 구성원의 삶과 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회에 살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 사회라면 전체적으로도 사는 게 덜 팍팍할 것 같기도 하고, 절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여러 부수적인 문제들도 조금씩 해결될 것 같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아득하고 불투명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과 함께 ‘시빅’이라는 개념에 대해 이해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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