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성의 폭력 Morning Read 21. ☕️ "폭력의 위상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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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주체는 최대의 성과를 향한 자유로운 강박에 몸을 내맡긴다. 자기 착취는 자유의 환상을 동반하는 까닭에 타자 착취보다 더 효과적이다.
생산의 수준이 일정 단계에 이르면 그때부터는 자기 착취가 타자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더 많은 성과를 가져오기 시작한다. 자기 착취는 자유의 감정과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성과주체는 스스로 불타버릴 때까지(번아웃) 스스로를 착취한다.
폭력은 이것도 저것도 안 된다는 억압이나 이것 아니면 저것을 택하라는 협박에만 있는 게 아니다. 끝없는 “또, … 또, … 또, …” 역시 폭력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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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번아웃을 오랫동안 인정하지 못했다. 몇 년 동안 ‘번아웃인가?’, ‘근데 이 정도로 번아웃이 온다고? 아냐, 난 그렇게까지 무리한 것 같진 같은데…’ 라는 자문자답을 반복했다. 번아웃이라기엔 난 뭔가를 ‘제대로’ 이룬 적이 없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굉장히 폭력적인 생각이다.) 시간이 지나 어느 순간 오래 방치된 번아웃을 확실히 인지하고 인정하게 됐다. 의문이 남았다. 왜 그때 나는 알아채지 못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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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의 요구는 자유를 강제로 전도시킨다. 타자 착취가 가고 자기 착취가 온다. 성과주체는 아주 쓰러져버릴 때까지 자신을 착취한다. 폭력과 자유는 하나로 합쳐진다. 폭력은 자기관계적인 성격을 얻는다. 착취자는 피착취자다. 가해자는 동시에 피해자다. 소진은 이런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현상이다. … 성과주체는 폭력을 막아내지 못한다. 그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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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힌트를 얻었다. 그동안 했던 모든 선택은 ‘내 의지에 따른 자발적인 것’이었고, 열심히 해서 성과를 내고 싶다는 욕망도 내 것이었다. 또 가끔씩 그 성취의 순간이 오면 당연히 기쁘기도 했다. 물론 그 기쁨은 잠시, 그 다음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해 오래도록 답답했다. 어쨌든 '내가 원하는 것'들이니 스스로 힘들고 지친다는 느낌이 어색하고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게다가 내 이상 속에 있는 '절대적으로 높은 목표'를 아직 달성한 것도 아니었다. 최선을 다한 것 같지 않았다. 최선을 다했다는 감각은 목표 달성과 연관이 있었다. 이상적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면 충분히 최선을 다한건지 스스로 심문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굉장히 가학적인 자기 평가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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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자아를 향한 자기 기획은 자유의 행위로 해석된다. 그러나 도달 불가능한 이상자아 앞에서 자아는 자기 자신을 결함이 많은 존재로, 낙오자로 인식하며 스스로에게 자책을 퍼붓는다. 현실의 자아와 이상자아 사이의 간극에서 자기공격성이 발생한다. 자아는 자기 자신을 투쟁의 대상으로 삼고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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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와의 이런 싸움에서 거의 탈진에 이르렀을 때 와서야 스스로에게 얼마나 가혹했는지 깨달았다.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긍정성/성과주의적 폭력이 내 안에서, 스스로를 향해 벌어지는 모습을 인지하기는 어려웠다. 어릴 때부터 오래도록 가지고 있었단 삶의 방식이었기 때문에 이미 관성이 되어있었다. 당연히 노력해야지, 당연히 발전해야지, 당연히 성장해야지. 조금 힘들지만 그래도, …
성과사회를 규정하는 화법조동사는 프로이트의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이다.
이 폭력이 깊은 관성이 되면, 탈진을 인지하고 심리상담을 받는 등 그것을 치료하려는 노력조차 이 싸움에서 버티기 위함이다. 물론 그것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어느 순간 정말로 코너에 몰렸을 때, 맥을 탁하고 풀게 되는 순간이 곧 올 것임을 직감했다. ‘자신을 잃는다’는(무엇을 위해?) 그 공포감 덕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자기 압박과 자책의 챗바퀴에서는 내려왔다. 그런 방식으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걸 소진의 끝까지 가서야 알게 된 덕분이다. 또, 내가 나의 인간됨(인간으로서의, 인간다운 삶)과 나의 내면을 내가 지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코너에 몰렸을 때 내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절박하게 물었다. 그것은 나의 성과나 행위가 아니라 나의 인간됨과 영혼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마치 목숨을 구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내가 이룬 성과와 나 자신을 합일시키며 살아온 사람으로서는 굉장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오래 그런 폭력과 함께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뭔가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에 대한 긍정과 믿음 때문이었다. 그 긍정이 자신을 압박했다. 할 수 있잖아. - 하고 싶잖아. - 노력해보면 되잖아. - 너무 성급히 포기하는 건 아냐? - 패배자처럼 보일 수 있어. 곧 폭력적인 언어가 되는 긍정성이 내면에서 꿈틀거린다.
조금 여유를 둬도 된다. 심지어 포기해버려도 된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안되면 어쩔 수 없지. 그게 내 인생에 정말 중요할까? 패배자가 되더라도 나 자신을 지키자. 이런 생각을 의식적으로 하려 노력하면서 내 안의 폭력을 잠재웠다.
그런 뒤 주변이 보였다. 수많은 내 주변에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일하고, 자신과 일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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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주체는 사실 주체라고 할 수도 없다. 성과주체는 스스로를 긍정화한다. 그렇다. 성과주체는 스스로를 해방시켜 하나의 프로젝트로 만든다. … 타자에 의한 외적 강제의 자리에 자유를 가장한 자기 강제가 들어선다. 이러한 발전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 자본주의는 실제로 죽음 및 죽음의 공포와 깊은 관계가 있다. … 축적과 성장의 히스테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상호 제약 관계에 있다. … 자본의 축적은 죽음, 즉 시간의 절대적 결핍에 대항한다. … 언뜻 보기에 진보와 생명의 기운을 발산하는 듯이 보이는 많은 경향들이, 이를테면 후기근대의 성과사회의 과잉 활동이 이 테제에 의하면 죽음 본능에서 나온 파괴적 충동이며, 그것은 종국에 가서 치명적인 붕괴, 시스템 전체의 소진을 초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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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사회 전체가 돌아가는 매커니즘과 문화가 나와 같은 개인을 만들어내는 구조였다는 걸 깨달았다. 몇 년 째 ‘번아웃’ 이라는 키워드가 핫하다. 2030 세대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신경정신과 진료를 받고있다. 그리고 오프라인 서점 매대에 보이는 수많은 ‘힐링 서적’까지. ‘~해도 괜찮아’류의 힐링 서적에 대한 불쾌한 느낌의 근원이 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긍정성의 폭력을 다시 긍정성의 무언가로 덮는 것 같아 불쾌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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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부정성이 파괴적인 것은 아니다. 머뭇거림, 멈춤, 심심함, 기다림, 분노와 같은 부정성의 형식은 상당히 많은 경우 건설적으로 작용하지만, … 소멸의 위기에 처해 있다. … 사유 역시 그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부정성과 결부되어 있다. 부정성이 없다면 사유는 계산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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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괴롭히던 긍정성의 폭력을 깨달은 뒤 얼마 안되어 책을 읽고 뉴스레터를 쓰기 시작했다. 구독자의 폭발적인 성장, 글쓰기 능력 향상, 타인의 지대한 관심, … 이런 '성장'이 이 활동의 목적이 아니다. 이런 활동은 아주 어릴 때 빼고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심지어 어느 시기에는 사람을 사귀고 만나는 것조차 전부 내 일이나 성장과 관련된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요즘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대한 흥분감이나 기대감이 별로 없다.
과도한 부정성인가? 사실 나는 부정성 속에서 어떠한 안도감을 느끼던 사람이기도 했다. 스스로에 대한 부정성을 인지하는 이 모든 과정도 긴 안도에 가까웠다. 부정성 속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즉 사유하는 것이 즐거웠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더 많이 돌아오기를 바라며 오늘도 읽고 써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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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ning Read는 제가 한 주, 혹은 두 주 동안
매일 제가 읽고 쓴 것 중 나누고 싶은 것을 추려서 보내는 뉴스레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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