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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이웃의 모습을 목격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함께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내 욕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놀라운 결단'은 없다. 자기 자신과 주변에 충분히 관심을 가지고 받아들이는 일이 우리에게 놀라운 결단처럼 보일 뿐이다.
임신과 출산을 생각해본 적 없던 그가 임신을 고민하게 된 건, 2021년 프랑스에서 주재원으로 일하면서부터다. “(한국보다) 프랑스인들은 자녀를 키우는 것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많았어요. 달리 보였죠.”
이후 프랑스에서 만난 여성 상사가 던진 말은 규진씨가 본격적으로 임신과 출산을 고민하게 했다. “상사에게 ‘난 와이프가 있다’고 말했더니 ‘그렇구나. 근데 애는 낳을 거지?’라고 되묻더라고요. 제가 레즈비언인 것에 놀라지 않았다는 점에서 첫 번째로, 동성 커플에게 출산을 추천한다는 점에서 두 번째로 놀랐어요.”
하지만 임신을 결정하는 데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그가 현재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불행은 내 대에서 끊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는 자신이 선택한 가정에서 행복감을 느꼈다. “제가 행복하니, 자녀도 행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언니가 나보다 더 좋은 엄마가 돼 줄 것 같았어요”라고 세연씨를 가리켰다. 세연씨는 “저는 낳을 자신이 없었는데, 규진이가 낳겠다고 하니 말릴 이유가 없더라고요”라며 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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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절대 원하지 않을 것 같았던 일들이 어느 날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이 되기도 하고,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욕망이 생기기도 한다. 내가 처한 상황이나 처지, 주변 사람, 한 번의 대화에 의해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런 관점에서 규진씨 부부의 결정을 바라본다.
벌린에 따르면 고슴도치형 인간은 모든 것을 하나의 핵심적인 원리와 연관 짓는다. 즉 모든 일을 관통하는 명료하고 일관된 원리가 있으니 이 자잘한 일들을 결정하는 하나의 큰 것을 찾아내야 한다고 믿는다. 반대로 여우형 인간은 다양한 목표를 추구한다. 그 목표들은 특별히 관계가 없고 때때로 서로 모순을 일으킨다. 이런 성향을 가지면 삶에서 실제 벌어지는 다채로운 일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뿐, 그것들을 꿰뚫는 유일한 진리에 도달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우리는 고슴도치처럼 모든 것이 단순명쾌한 하나의 해답을 원하지만, 사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나도 타인도 마찬가지로 복잡하고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에도 익숙한 장면, 익숙한 전개들이 가득한데, 여전히 그 메인 설정을 파괴하는 이야기가 반갑기도 하다. 나와 타인의 지루한 설정에 냉소하지도, 새로운 이야기에 두려워하지도 않는 여우형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