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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갔을 때는 다행히 훨씬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공동체 생활을 하고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학교였기 때문이었나 싶다. 나를 포함해 엄청나게 다양한 나라에서 온 국제반 친구들이 있었던 게 결정적이었다. 학기 초반에 소수자로서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고통에 대해 함께 나누고, 실제로 학교 시스템에 변화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국제반 친구들 중에서도 미국에서 온 백인 애들은 ‘그 국제반 친구들’에 속하지는 않았다. 대니시 선생님들이 좋아하는 ‘쿨 키즈(cool kids)’ 였다. 그들은 영어에 능통한 미국 청년들을 사랑했다. 아무튼 이런저런 경험이 무색하게 몇 년 전 국제반이 없어졌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이질적인 존재”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몰라서였을 거라 짐작한다. 우리의 소란스러움이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수줍은 덴마크인들..
그래도 그곳에서 좋은 덴마크 친구들도 많이 만났다.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 큰 학생 중 한 명이었던 미셸이 나와 이야기 하기 위해서 천천히, 매번 오랜 시간을 들여 골똘히 생각하며 말하던 얼굴을 기억한다. 대니시들은 어린 애들부터 할머니까지 모두 영어를 잘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영어를 못하는 자신에 대해 수치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그래서 최대한 영어를 피해가려고 노력하는 친구들은 아예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미셸은 가장 서투른 사람이었지만 나에게 다가와줬다. “미셸”이라고 한국어로 대충 쓴 종이를 소중하게 간직하며 방에 붙여뒀던 것도 기억한다. 추석 즈음이 되어 향수병에 시달리던 나에게 따듯한 차를 내어주고, 이내 다른 친구들과 깜짝 파티를 열어줬던 카트린과 마티아스도 기억한다. 또 오랫동안 아파서 우울하던 나에게 마니또처럼 매일 몰래 그림을 그려서 가져다 줬던 사이먼을 기억한다. 그리고 늘 세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하는 병원에 함께 동행해줬던, 끝없는 돌봄에 ‘moa’(엄마)라고 농담삼아 부르던 마틸다를 기억한다. 그리고, …
그렇게 자신만의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거나, 문화의 다름을 떠나서 나라는 사람을, 감정을 케어해주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 내 마음 속에 깊이 남아있다. 그래서 덴마크에 가지는 나의 감정은 여러가지의 색을 띄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친절하고, 성숙한 시민들을 바깥에서 혹은 안에서 지켜보면서 감탄하고, 놀라고, 실망하거나 친밀해졌다. 그래서 덴마크에서의 삶과 사람들에 대한 딱 떨어지는 판단을 내리진 못했다. 여전히 다 쓰지 못한, 외롭고 타자화가 됐던 순간들과 인간 대 인간으로서 강렬한 교류를 나누는 순간들이 공존했다. 그래서 좀 더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가보다. 어쩌면 그래서 제 2의 고향이라는 낯간지런 개념으로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서울, 한국에서 내가 오만 감정이 드는 것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해서 말이다. 이번 여행에서도 여전히 모종의 안정감을, 또 ‘세상의 음각’처럼 느껴지는 경험이 조금이라도 나를 침범할까봐 불안을 느끼는 나를 모두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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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Copenhagen이라는 짧은 시리즈로 내가 그 곳에서 배운 것들과 사랑스러운 것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든 잊지 못 할 경험 두 가지를 처음으로 글로 적어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용기와 감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11년이나 미뤘나보다.
아직 내 안에서 정의되지 않은 것들을 생각한다. 평생 접점이라곤 없는 도시의 이질적인 존재로 살면서 어떻게 내 일부를 쌓아올린 장소가 된 것일까. 궁금증을 해소할 기회가 생기면 좋겠다. 그때 또 다른 내 일부가 쌓아올려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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