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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테크 업계의 이면을 다루는 책 <액세스가 거부되었습니다>를 낸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그 동안 <코드와 살아가기>, <실리콘 밸리의 목소리> 같은 해외 이야기만 읽다가 드디어 한국의, 가장 가까운 곳의 이야기를 여성의 관점으로 읽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반가운 마음으로 빠르게 사서 읽었다.
책에는 테크 업계에 진입하기 위한 과정부터 진입한 후의 경험까지 여러모로 우리가 보통 접하는 관점과는 다른 이야기들이 담겼다. 예를 들면 압박을 견뎌내는 게 역량이며('당연한 거 아냐!?'), 성장을 위해 끝없이 자기계발을 하느라 일상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 그리고 스타트업/테크 업계가 가지고 있는 낙관주의의 이면 같은 것들. 개발자의 독성 말투나 과대 대표 현상은 평면적으로 다루지 않고 전반적인 노동 환경과 시스템에 대해서도 짚고 있다. 참, 내가 취업을 준비했던 6-7년 전과 달리 부트캠프 경향이 회사 이름을 걸고 더 입시 경쟁화 된 것은 새롭게 알게 됐다. 책에 나오는 관점들 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고 또 다른 다른 관점이 더 많이 덧붙여지면 좋겠다.
책에서 다루는 몇 가지 주제만 빠르게 소개해본다.
(1) 개발자의 독성 말투, 단지 개인의 탓일까?
불친절하고 날선 말투에 개인의 책임이 없다는 게 아니다. 다만 이런 현상이 특정 직군에게서 자주 발견된다면 한 번쯤 그 너머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 기술력부터 정신력까지 모든 걸 혼자 감내해야 하는 노동환경에서 소통에 힘쓸 여력이 부족해서일 수 있기 때문이다.
(2) 테크 업계 낙관주의의 이면
실제로 많은 테크 기업이 ‘최소한의 기능을 가진 서비스’를 빠르게 출시하고 이를 토대로 또 다른 가설을 세워 기능을 구현하는 프로세스를 갖고 있다. 이런 방식은 실패를 용인하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높이 평가하는 문화를 반영한다. 그러나 동시에 방향성을 깊이 고민하지 않고 단 하나라도 시장성에 들어맞는 길을 찾아보는 데 주력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하나의 문을 열기 위해 백 개, 천 개의 열쇠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가운데 단 하나라도 구멍에 들어맞아 잭팟이 터지기를 기대하면서. 테크 업계가 가진 낙관주의의 이면에는 ‘뭐든 하나만 대박 나면 된다’는 한탕주의가 숨어 있다. 서비스가 작동하는 산업이나 생태계가 어떤지, 이 문을 열었을 때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 가운데에서 어디로 방향을 잡을지 깊이 있게 토론하는 것은 구식의 것으로 여겨진다.
(3) 압박 견디기라는 역량
얼마 전 구인구직 SNS인 링크드인에서 한 기업의 개발자 구인공고를 봤다. 자격요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는 압박을 견디며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We are looking for people who have the ability to work under pressure.” 그 회사는 부당한 강요를 개인의 능력으로 치환하는 묘기를 부린 것이다. 실제로 ‘정신력’, ‘스트레스 관리’, ‘회복탄력성’ 따위의 용어를 동원해 압박적인 노동환경을 개인이 돌파해야 할 몫으로 전가하는 경우를 수시로 목격한다.
(4) 아무도 관심가져주지 않는 유지보수 노동
유지보수 노동은 강도도 양도 상당하다. … 그러나 유지보수 노동은 결코 빛나는 성취를 안겨주지 않는다. 아주 특별한 때가 아닌 이상에야 눈에 잘 띄지도 않기 때문에 보람을 느끼기도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유지보수 노동은 제대로 값이 매겨지지 않고 대체로 평가절하된다.
그러나 아무도 컵을 씻지 않는다면 어떨까. 누구도 거리를 청소하지 않는다면. 고장 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는 사람도, 전봇대에 올라가 전선을 고치는 사람도 없어진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