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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왠지 마음이 동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공명하게 되는 사람도 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알게 되지만, 그 모든 방식이 언제나 놀랍다. 나는 왜 이 사람을 보자마자 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우리는 이제야 친구가 되었을까?
나는 타인에게 내 인생이나 기분 깊은 곳의 지형을 많이 드러내는 방식으로 자주 관계 맺는다. 소위 말해 상대방에게 ‘속을 드러내는’ 것이다. 최근 이 방식이 맞나 돌아보게 되는 일이 있었다. 왜인지 이 사람에게는 나의 생각을 나누고 싶고, 또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많은 것들을 이야기했는데 사실 우리는 잘 맞지 않는 사람들이었던 걸까 싶었다. 혹은 상대방의 가장 깊은 곳의 마음은 알지도 못한 채 내가 나의 마음을 드러내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 끝에 내가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이 너무 과하게 들여다보이고 공유하는데 의미를 두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나는 왜 마음의 깊은 곳을 드러내는 것, 듣는 것, 공유하는 것에 매료될까. 사람들의 이야기는 보편적 이야기 플롯의 미추와 상관없이 각자의 어떤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듣는 일은 흥미롭고 멋지다. 내가 좋아해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 많이 궁금하고, 또 그들에게 내 이야기가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는 욕망을 만든다. 그러다 종종 실수를 하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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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사는 일의 아픔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법은 없다. 그렇지만 줄이는 방법은 있다. 우리가 두려움을 참고 더 많은 이야기를 공유할 때, 더 귀를 기울일 때, 타인의 온전한 이야기가 나의 온전한 이야기에 더해질 때 아픔은 줄어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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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타인의 영혼과 손을 붙잡고 타인이 털어놓는 이야기의 일부를 알아볼 때 우리는 두 가지 진실을 인정하고 긍정하게 된다. 우리는 고독하다. 그렇지만 혼자는 아니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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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이야기하듯 인간은 철저히 혼자고 고독하다. 이 사실이 너무 무서워서 나는 사람들에게 나를 드러내고 또 들여다보려고 하는 것 같다. 전혀 모르고 살던 타인과 이야기하다 영혼이 통하는 것 같은 그 순간을 우리는 9살 때도, 14살 때도, 18살 때도,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느껴왔고 그 연결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강렬한 흥분과 안도감을 동시에 선사한다. 그 순간에 유일하게 외롭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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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숨는 곳이 아니라 발견하는 곳”이라고 소설가 지넷 윈터슨은 지적했고 나한테는 정말 그랬다. 내 지하 저장고를 열고 내가 가장 취약하고 가장 통제력이 없었던 시기를 조명하자 전에는 몰랐던 공동체를 발견하게 되었다.
“언어는 숨는 곳이 아니라 발견하는 곳”이라는 이야기가 와닿는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나 자신을 찾아갈 때가 많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공동체도 찾을 수 있었던 게 맞는 듯하다. 이 글을 쓰며 언어를 길어내는 일도 마찬가지다. 내 마음의 깊은 골과 먼지 쌓여 어두운 곳들을 쓰다듬어 보고 있다. 타인과 연결될 때 느끼는 정상의 행복감과, 단절된다는 좌절감의 골짜기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야 하는 삶을 좀 더 받아들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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