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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일어난 일들을 혼자 단편적으로 이해하며 살다가, 가끔씩 친구들을 통해 완전히 다른 측면의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내겐 A라는 의미 밖에 없었던 일이 어떤 친구에게는 B라는 모습으로 보이고, 다른 친구에게는 이전의 C라는 일과 연결되어 보인다는 것, 또 X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공유받으면서 번뜩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내 이야기를, 의미를 재구성한다. ‘조각난 나’를 ‘제대로 맞추어서 돌려받는’다.
이렇게 지켜봐 준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우리가 스스로의 삶과 너무 가까워 알아채지 못한 변화와 성장이 담겨있다. 그렇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직접적인 개입 없이도 내 삶에 굉장한 영향을 미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우정의 가장 놀라운 점이다.
그래서 우정은 어릴 때 받는 부모의 돌봄처럼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존재의 직접적인 개입과는 다른 방식의 돌봄이다. 어느 순간 갑자기 혼자 감당하고 헤쳐나가야 하는 상황에 부딪쳤을 때, 누군가 길 옆에 서서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봐 준다는 거대한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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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개비는 결코 화려하지 않은데, 최고의 우정도 이와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증인이나 목격자도 필요 없다. 또한 측정 가능하고 현금화할 수 있는 어떤 목표나 성취를 달성할 필요도 없다. 정말로 실속있는 우정은 대개 무대 뒤편에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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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인생의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만난 다양한 친구 중에는 앤절라처럼 오래된 친구도 있고 좀 더 새로운 친구도 있지만, 모두가 항상 나를 위해 나타나주는 사람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사회적 호위대(social convoy)’라고 부르는데, 마치 호위대처럼 긴 세월 동안 우리 곁을 지키며 온갖 것으로부터 보호해주는 핵심적인 관계들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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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도 내게는 따개비 같은 사회적 호위대가 있다. 매일 만나거나 이야기하지는 못하지만, 인생의 한 시기를 같이 겪고 그때부터 쌓아온 신뢰와 시간으로 중요한 일들을 함께 해주는 사람들이다. 삶의 다음 챕터를 결정하거나 어려움을 겪을 때 방황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들고 가 보여주고 다양한 해석을 듬뿍 들으며 보호받을 수 있는 든든한 관계다. ‘사회적 호위대’라는 이름이 참 잘 맞는다.
나 역시 누군가의 사회적 호위대가 되어 지켜보며 그 사람에 대한 서사를 내 안에 쌓아간다. 애정을 가진 타인이 내 삶을 지켜봐 주고, 나도 누군가의 삶을 지켜보면서 필요할 때 내가 친구에 대해 쌓아 온 이야기를 꺼내어 준다. 우리는 아마도 이 과정에서 생의 의미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이 글을 부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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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깨달은 사실은, 우리가 지지와 사랑, 인정을 어디에서든 — 꼭 가정이 아니라도 —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 친구가 필요하지 않은 순간은 오지 않을 것이며 친구들은 영원히 가르침을 줄 것이다. 이것만은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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