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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안과 걱정이 많은 편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어쩔 줄 몰라 자주 내 걱정을 다독여주는 친구들이 걱정 인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보통 내 걱정은 어떤 일이나 상황에 대해 최악까지 상상하는 버릇에서 나온다. 아마 일종의 방어 기제인 것 같다. 삶이 내가 바라는 모습이 아닐 때 좌절감이 굉장히 큰 편이기 때문에, 미리 최악을 상상하고 최선을 다해 준비해서 그걸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내가 최악의 상황까지 앞서 보고 걱정을 하지 않으면, 그 상황을 미리 생각하지 않은데에 대한 벌을 받을 것 같은 기분마저 들 때가 있다. 그래서 벌을 받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모든 안좋은 케이스를 미리 생각하고 차단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걱정이 도움이 될 때도 종종 있다. 후회할 것임을 알기 때문에 위험하거나 자기 파괴적인 일이나 관계를 현명하게 피할 수 있고, 원하는 결과를 성취해내는 데 성실하게 노력한다. 뭐든 앞서 걱정하고 준비하는 삶은 좋은 결과, 안전한 삶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그를 위해 일상의 예민함을 잔뜩 높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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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할까봐, 친구가 나를 오해할까봐, 코로나에 걸릴까봐 등 명확한 이름를 가진 근미래에 대한 걱정을 주로 했다면 요즘은 좀 이상하다. 뭐가 두렵고 불만족스러운지 잘 모르겠는데 미셸 오바마가 쓴 것처럼 ‘매일매일 내 마음은 나에게 제대로 하는 게 없다고 한다.’와 같이 스스로를 판단내리는 제 3의 눈이 내 안에 있는 기분이다. 원하는 삶을 살고 있나? 스스로에게 떳떳할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나? 그러지도 않으면서 불안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무언가 회피하고 있는 건 아닌가? 지금이 불만족스럽다면 완전히 놓아버리고 다른 것을 찾을 용기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점을 찾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이렇게 살면 안될 것 같은데.. (심지어는 왜 이런 생각으로 에너지를 허비할까?)
정체가 뭔지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들이 자꾸 일상을 치고 들어온다. 이런 생각들은 정말 피로한데 잘 멈춰지질 않는다. 가까운 미래에 대한 걱정은 많아도 먼 미래나 삶 전체적으로는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편이라 밸란스가 맞았지만 이제 그렇지가 않다. 스스로 만족할만큼 충만한 삶을 살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드나보다. 스스로 부족한 부분들을 나 자신이 잘 견뎌주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뭔가를 리셋하고 싶다는 기분이 드는데, 그것조차 나이브하고 허황된 생각인 것 같아 짜증이 난다. 책을 읽으며 미셸 오바마도 내면에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있다는데에 놀랐다. 특히 두려운 마음을 ‘독’으로 비유한 게 와닿았다. 상시적인 불안과 두려움은 해독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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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에 저항하는 것은 언제나 내 자신의 일부에 저항하는 일이다. 이것의 두려움의 해독에서 아주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을 알아보고 길들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 더 많이 연습하면 더 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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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생각해보니 불안한 마음과 뻗어나가는 걱정을 다독이려고 할 때마다 나는 무언가 읽거나 썼다. 혹은 친구들과 나눴다. 비슷한 고민을 과거의, 허구의,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부딪치며 살아가는지 읽고 들으면서, 풀리지 않은 실타래 같은 내 마음은 무엇인지 쓰면서 조금씩 풀어낸다. 아침에 뭐든 읽고, 뉴스레터를 썼던 이유도 이 마음을 잠재우기 위함이었다. 요 사이 읽고 쓰는 일도 충분히 하지 못할만큼 집중력이 길지 못했다. 무기력하기도 했다. 다시 일어나서 읽고, 써봐야 할 것 같다.
실체가 있는 두려움은 합리적이지만, 한 사람의 세계를 좁아지게 한다는 말을 다시 떠올려본다. 두려움도 좀 안아보고, 또 최선이 아닌 상황들도 좀 더 그대로 받아들여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