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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과정이 아니라 일의 결과, 어떤 목표를 했고 이뤘는지가 중요한 환경에서 나고 자라 그런지 아직도 매일 ‘뭔가 이루지 못했는데’라는 생각에 은은하게 시달린다. 얼마 전 동료와 대화를 나누다가, ‘학교 다닐 땐 시험이 있어서 너무 싫었는데 회사 생활은 시험은 없어서 좋다’길래 ‘저는 매일이 시험 같은데요’라고 했다든지.. (상대방은 충격받았다)
충격을 덜어드리려 초년생 때 많이 그랬고 지금은 아니라고 너스레 떨었지만 아직도 조금은 그렇다. 회사는 매일 가야하고 매일 새로운 시험을 치기 때문에 준비할 시간이 없다. 준비 없이 시험을 치는 걸 정말 싫어하는 나인데.. 벼락치기에도 젬병인데.. 매일이 준비없이 시험장에 들어가는 기분이라 일이 정말 힘들었던 적도 있었다.
내가 시험이라고 느낀 건 아마도 일을 너무도 중요하게 여기고, 또 얼만큼은 반드시 성취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시험이 아니라 쳐도 실무자로서 하루하루 하는 일로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건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과정을 중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멋진 결과물을 내놓는 동료들을 보면 자극받고 ‘나도 뭔가 이뤄야 하는데..’하며 압박을 느꼈던 것 같다. 저만큼 성취하면, 저런 결과물을 내놓으면 기쁘고 뿌듯하겠지?하면서 매일 낮은 시험 점수를 받는 기분 대신 기쁨을 느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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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뭔가를 성취하는 순간마다 내가 상상한 만큼 기뻤는지 모르겠다. 너무 과잉으로 쏟아낸 나머지 넉다운되어 회복의 시간을 가지거나, 과정에서 받았던 극도의 스트레스를 풀어야 했다거나.. 성취는 정말로 한 순간이고 나머지는 다시 지루한 일상이다. 그래서 이제는 엄청난 성취, 대단한 목표 이런 것만으로 행복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뭔가를 펑! 하고 이뤄야 한다는 생각이 좀 줄었다. 그러고 나니 더 이상 하루하루가 시험기간 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홍민지 PD의 글을 읽으며 나도 성취보다는 뿌듯함으로 살아가야 즐거운 사람이라는 걸 다시 생각했다. 요즘은 매일이 작은 실망과 작은 뿌듯함들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은 하루 단위가 아니라 거의 매 순간 준비 없이 대응해야 하는 일들의 연속이라는 걸 깨달으며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그런 동시에 하루아침에 되는 일도 없다. 매일 평가 받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 준비없는 일들의 연속을, 작은 실망과 뿌듯함들을 쌓아가는 것이다. 쌓인 시간은 당장이 아니라 나중에 알아서 모습을 드러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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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에 무언가 읽고 이 글을 쓰는 일도 그렇다. 숫자로는 10번째, 횟수로는 11번째인 이 뉴스레터를 쓸 때마다, 보낼 때마다 ‘뿌듯’하다. 준비없이 무언가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지만, 생각해보면 이 뉴스레터를 쓸 때는 그냥 자리에 앉아 일단 써서 보냈다. 덕분에 내게는 3개월 동안의 기록, 50명의 구독자가 생겼다. 성취하겠다는 목표 없이도 무언가 쌓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뿌듯함을 쌓는 건 이런 느낌이라는 것을 간만에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좋아할지, 어떻게 평가할지(내 얘기만 하는 이 메일이 재미가 있을까? 유익할까? 하는 마음의 소리)를 조금은 제쳐두고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일을 매 주 할 수 있어 기쁘다. 무작정 키보드 앞에 앉아서 뭔가 써 내려가는 시간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들여다볼 수 있다. 이런 시간을 50명과 함께 나눌 수 있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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