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얼로그의 목적은 어느 한 개인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다. “다이얼로그에서는 이기려고 하는 자가 없다. 다이얼로그가 제대로 된다면 모두 승자가 된다.” 다이얼로그에서는 개인이 각자의 노력만으로는 도달하기 힘든 통찰을 얻는다. “공통 의미의 개발에 토대를 둔 새로운 종류의 지성이 생겨난다. … 사람들은 이 공통 의미의 조합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지속적인 발전과 변화가 가능하다.”
그간 모든 종류의 시도가 실패했던 영어 공부가 드디어 한 달 이상 이어지고 있다. 친구의 제안으로 몇 명이 모여 일주일에 몇 번 구글밋으로 만나 영어 말하기 시간을 갖는 방식이다. 강의를 듣거나 교재를 사서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모여서 어떤 방식으로 공부할지 함께 정하고 만나서 시간을 보낸다. 뛰어난 한 명이 리딩하지 않으면 이런 모임은 잘 굴러가지 않는다는 걱정도 이겨내고 왜인지 제대로 순항 중이다.
모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모여서 밥을 먹으며 어떻게 진행할지 고민했다. 찬반 토론 형식으로 하고, 매시간 돌아가면서 호스트가 되어 주제와 팀을 정해서 알려주기로 정했다. 모임에서 우리는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고, 한계를 수용하고, 같이 나아지기 위해 생각을 나눈다. 이 공부 시간에 나는 사고가 경직되기 보다는 자유로워진다. 사람들 사이에 있지만 편안하고 상쾌하다.
영어가 중요하기보다는 이야기를 하며 각자의 생각과 삶에 대해 이해하는 과정이 동반되기 때문에 앞서 인용한 ‘다이얼로그’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영어를 도구로 학습 공동체를 만든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공동체’라는 말이 주는 모종의 경직도 때문에 이렇게 정의하는 게 조금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 말 없이는 이런 방식으로 학습하며 느끼는 즐거움과 가치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학습 공동체는 일반적인 ‘공동체(Community)’와는 매우 다르다. 일반 공동체는 수동적으로 머물 수 있으나 학습 공동체는 그럴 수 없다. 일반 공동체에서 사람들은 공동체에 소속되기 위해서 학습한다. 하지만 학습 공동체에서 사람들은 학습하기 위해 소속된다. … 오히려 학습 공동체란 ‘학습 과정에서의 적극적인 관계’로 정의된다.
새로운 공부 문화에서 사람들은 공통적인 관심과 기회에 따라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유연한 관계 속에서 서로 참여하며 상호작용을 통해 배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모든 참여자들은 동등한 위치에 있다. 그 누구도 교사나 학생과 같은 전통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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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험을 뭐라고 설명할지 고민하면서 안드라고지(Andragogy)라는 개념을 새로 알게 됐다. 안드라고지는 어린이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페다고지(Pedagogy)와 자주 비교되는 개념으로 성인을 위한 교육 방법론이다. 자기 주도적이고 의미 중심적인 학습 경험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자신의 경험을 학습 과정에 통합하고,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지식에 중점을 둔다. 학습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자기 결정적인 학습 환경에서 더 잘 배운다고 가정하는 방법론이다. 우리는 대부분 직접 학습 과정을 만들거나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공부를 해 본 적이 없다. 그저 ‘교육을 받을 뿐’. 그래서 공부라는 말이 더 피곤하게 느껴진 건 아닐까.
안드라고지에 대해 알게 된 후 생각해 보니 이번 영어 공부가 교육(education)이 아닌 배움(learning)의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학습 경험을 만들 때 일방적인 '교육'보다는 상호적인 '배움'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두 관점의 차이는 이렇다. 교육은 주로 학교, 대학, 교육 기관과 같은 환경에서 이루어지고 특정 지식, 가치, 기술을 일방향적으로 전달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회적으로 인정된 자격증이나 학위의 형태로 그 ‘결과’가 인정된다. 반면 학습은 지식이나 기술을 습득하는 개인적인 ‘과정’을 의미한다. 즉, 학습은 교육 과정이나 교육 기관과 상관없이 다양한 환경에서 일어날 수 있고, 과정에 가깝다. 이 과정은 지속적이며, 삶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활동이다.
운 좋게 내가 교육 기관에 속해 배울 때도 종종 자기 주도적이고 성찰적인 배움의 경험이 제공됐고, 때로는 그런 곳을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덕분에 어렴풋이 둘의 차이와 내가 좋아하는 배움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다만 그런 기회는 자주 오지 않았고, 이것이 왜 좋은지도 명확히 언어화 하지 못했다. 아주 오랜만에 온전히 탈교육적으로 그냥 모인 사람들과 배움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기쁜 마음으로 용기 내어 글로 적어본다. 자유롭고, 상쾌하고, 상호적인 배움의 시간. 사실상 자기 돌봄에 가까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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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시간을 사람들과 일하고, 공부하고, 활동하며 부대끼는 사람들에게 ‘함께’, ‘학습’이라니 좀 피곤한 이야기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는 그 부대낌 속에서도 드물게 배움이 일어나는 순간마다 왠지 ‘할만한데?’라고 느끼곤 한다. 영어 공부라는 막대한 결심을 하지 않더라도 일터에서, 생활 속에서 이런 배움의 기회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각자의 방법으로, 각자의 관점으로, 함께 의미를 추구하는 삶의 가능성 말이다. 나는 이런 기회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