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그냥 책이다. 무슨 말이냐면, 책에서 삶의 진리나 지혜를 반드시 찾을 필요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어떤 대단한 철학적 메시지를 찾으려고 ‘오징어 게임’을 보는 게 아니지 않은가. 책도 마찬가지다. 그저 즐기는 게 우선이고, 그 안에서 깨우침을 얻는 건 개인의 선택이다. 책에서 매번 무언가 얻으려 할수록 독서는 실패한다. 읽다가 재미있으면 계속 읽는 것이고, 지루하면 덮고 다른 책을 뒤적거려도 괜찮다.
책을 읽고 뉴스레터를 쓴다고 하거나, 이미 뉴스레터를 읽고 있는 분들이 종종 내게 어떻게 책을 그렇게 많이 읽느냐거나, 책을 더 많이 읽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온다. 아마 이 질문들은 독서를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으로 읽는 것으로 전제했을 것이다.
그래서 조금 멋쩍어지는데, 나는 긴 시간 동안 통독에 대한 압박을 줄여왔다. 통독에 대한 압박을 느끼면 나는 책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래서 책이 좋고 읽고 싶은데 읽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압박을 줄이는 방향으로 조금씩 바꾸게 됐다.
그렇게 바꾸는 과정에서 독서 습관도 많이 달라졌다. 일단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을 때가 많다. 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한 권의 책을 통으로 읽을 때도 있지만, 읽다 그만 두는 책, 필요한 부분만 뽑아서 읽는 책도 많다. 그냥 사두거나 받은 책 중에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책도 있다. 하지만 완독을 하지 못했다고, 펼쳐보지도 못했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 책은 현재의 나에게 자신의 역할을 다 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 어느 날 갑자기 그 책을 펼쳐볼 수도 있고, 읽다 만 책의 다른 부분을 재밌게 읽기도 한다. 갑자기 그자리에서 완독을 할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독서란 책의 일부와 내가 우연한 기회로 만나게 되는 것일 뿐이다. 현재의 내가 당장 그 책의 모든 것을 흡수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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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책을 안 읽을까. 유튜브가 대세라서? 넷플릭스가 훨씬 재밌어서? 영상과 음악 산업이 대중의 흥미를 유발하기 때문에? 모두 일견 맞는 말이지만, 핵심은 따로 있다. 바로 ‘책’을 ‘유희거리’로 인식하지 못하게 된 문화 때문일 것이다.
마치 숏폼을 보는 것처럼 내게 자극이 되는 문장이나 페이지를 찾아다니며 읽을 때도 있다. 칼럼에서 이야기하듯 내게 책은 유튜브나 OTT 콘텐츠처럼 ‘유희거리’이기 때문이다. 종종 진득하게 책의 서사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내게 지금 필요한 문장이나 재밌는 이야기를 찾아다니면서 읽는다. (그래서 서사가 비교적 덜 중요한 비소설을 더 많이 읽는 편이다.) 그리고 그런 재밌는 페이지를 접어두거나 밑줄을 그어두면 나중에 다시 펼쳐보면서 내가 이 책을 읽던 때에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재밌다고 느낀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어서 또 다른 즐거움이 된다. 마치 일기장을 다시 보는 것처럼 느껴진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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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 콘텐츠의 시대지만, 아날로그 미디어인 책이 주는 즐거움은 분명히 있다. 혹시 이 재미를 느끼고 싶다면 추천하는 방법이 있다. 베스트셀러를 외면하고, 서점 서가를 거닐다 ‘느낌’이 오는 책에 과감히 투자해보자. 온전한 내 느낌만으로 선택한 책을 구매한다면 이미 독서는 시작됐다. ‘독서’는 완독을 의미하지 않는다. 수만 권의 책 속에서 내가 선택하는 과정 자체가 독서다. 올해엔 당신만의 독서가 시작되길 바란다.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의 서가나 서점을 둘러보는 재미를 느꼈다. 빼곡한 책장에 꽂혀 있는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서 지금 내게 신호를 주는 하나의 이야기를 고르는 재미가 있다. (타로 카드를 뽑는 것 같이!?) 표지를 보고 골랐는데 내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기도 하고, 제목이 특이해서 골라봤는데 지금 꼭 필요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베스트 셀러 코너에 큰 관심이 없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이런 우연의 즐거움을 느껴보면 재밌다.
요즘에는 친구들이 읽고 있거나 추천해 주는 책, SNS를 통해 재밌어 보이는 책들을 휴대폰에 캡쳐해두면서 독서를 시작할 때가 많다. 저장해 둔 책을 서점에 가서 찾아본다. 재밌어 보이면 산다. 기대를 배반하는 책들도 많다. 그 과정도 즐기면 된다. 서점에 간 김에 그냥 둘러보다가 재밌는 책을 발견하고 사 올 때도 있으니까. 저장해 둔 지루한 책이 아닌 엉뚱한 책을 찾아 사 오는 기쁨도 느껴보자.
책을 사는 것도 어느 순간 큰 짐이 되어 자리를 차지하고 이사할 때마다 힘들어진다는 생각에 전자책을 사서 읽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읽기 경험의 질적인 차이와 점점 짧아지는 집중력 때문에 종이책을 대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냥 마음껏 종이책을 산다. 지난한 일상 가운데서 책을 통해 얻는 즐거움은 짐이 될 수 없다. 대단한 깨달음이 아닌 즐거움으로, 조금 더 단순하게 접근하면 부담이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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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 나, 책을 사기만 하는 나, 책을 읽다 마치지 못하는 나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면서 책에서 멀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넷플릭스에서 콘텐츠를 고르고, 보다가 재미없으면 뒤로 가는 것처럼 독서도 마찬가지 경험을 만들어보면 좋겠다.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구경만 하고 빈손으로 나와도 된다. 책도 유튜브처럼 소비할 수 있고, 그렇게 해도 된다. 죄책감을 느낄 이유는 없다. 다 읽지 못하고 지나쳐가는 책은 그대로 보내 줘도 된다.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을 고르는 것에서부터 나만의 독서가 시작된다’는 말이 맘에 든다. 책에는 완전히 다른, 커다란 세계가 펼쳐져 있고 우리는 누구나 어릴 때 한 번쯤 그 세계에 푹 빠졌다가 나와본 경험이 있다. 그 경험을 기대하면서 책을 보다가, 그때만큼 몰입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아쉬움을 느끼는 건지도 모른다. 이제 아쉬움을 뒤로하고 아주 가끔, 조금씩 그 세계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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