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을 맞아 작년 하반기의 일기를 들춰봤다. 그때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쓰여있었다.
정상성과 그 바깥. 정상성이 주는 아늑함과 익숙한 미감이 있다. 정치적으로든 실제 미학적으로든 익숙한 미감이 있다. 그리고, 정상성 바깥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 자유로움의 세계. 그 세계는 즐거움과 자유를 준다. 숨통이 트인다. 그리고 좀 더 솔직하게는 더 진보적인 선택을 했다는 만족감까지..
당시 나는 하루의 많은 시간 동안 정상성 안에 편입되어 있는 상태가 좀 버거웠고, 개인적인 공간으로 돌아와서는 그 정상성 속에 속해있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풍요나 평화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것이 안락했다. 좋았다. 그런 동시에 조금 숨막혔다. 자유로움의 세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의무와 책임, 시스템과 거기에 동화되는 자신이 보였다. 여기에 대해서 더 생각해보고 싶었는데, 안락함을 느끼는 스스로를 다그치는 손쉬운 방식도 시스템을 분석적으로 바라보는 방식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글을 쓰기 시작했다.
생각할 것이 많은데 글을 쓸 시간과 기운이 많이 없다. … 내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모르겠을 때 나는 다시 무언가 읽고, 쓴다. 그런 나를 또 만난다. 여러 회 만나봤는데, 이번은 참 간만에 만나는 것인데다가 여러 변화들이 있어서 그런지 다행이고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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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5개월 정도 일기를 새로 쓰다가, 올 해 1월부터 뉴스레터를 통해 나 자신과, 그리고 사람들과 소통하게 됐다. 아직 고민에 대한 완전한 결론을 내리진 못했지만 왜인지 해결되지 못한 그 고민을 통해 더 풍요로워진 건 확실한 것 같다. 더 이상 나 자신을 A와 not A의 프레임 안에서 해석하기 보다는 그냥 더 많은 이야기를 써내려가 봤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상실한 것, 내가 강하게 믿고 싶은 것들과 이제는 믿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수십 개 쌓였다. 문장이 된 나의 마음과 일상의 단편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된다. 정상성이나 그 바깥과 같은 경계와 무관한 고유한 의미의 공간이 만들어졌다고 할까. 때로는 그런 진공의 영역도 누구에게나 필요하니까. 그게 내가 앞서 말한 풍요로움인지도 모르겠다. 내 삶에 스스로 서사를 부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내 삶에 작고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주었다.
어떤 방법을 쓰든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자신의 본 모습으로 글을 써야 한다. 업무용 사고 회로를 가동시키거나, 학자로서의 정체성에서 벗어나지 못해 내부인들만 알아 듣는 특수 용어를 쓰면 글이 망가진다. 당신이 전하고 싶은, 당신만이 제시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깨달아야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지가 분명해진다.
- <뉴욕타임스 편집장의 글을 잘 쓰는 법>, 트리시 홀
뉴스레터를 시작하며 더 넓은 범위의 다양한 주제로 글을 썼고, 감사하게도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자기 이야기를 나눠주었다. 처음에는 일상의 사소한 순간에도 쉽게 심연으로 들어서는 나의 마음과 그 안에 출렁이는 이야기들을 꺼내는게 의미가 있을까 의심했지만, 의미가 있었다. 무엇에도 집중하기 어려운 시기에 몇 시간 정도는 마음 가는 문장과 그로부터 만들어진 나의 생각, 기억, 상상, 마음들을 써내리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자체로 좋았다. 내 마음에 얇고 투명한 기쁨이 겹겹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일기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독자나 소통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필요한 것은 할 말이 없는 것 같아도 키보드에 손을 올려보는 것, 펜을 잡아보는 순간이다. 내 안에 지금 어떤 생각들이 출렁이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내가 쓸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빠르게 지나가는 하루하루와 그 편린으로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란 사실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곳에서 서사와 의미를 발견하려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것을 글로 쓰면 별 것이 된다. 더 많이 읽고 쓰면서 나 자신과 세계의 의미를 발견해 나가는 시간을 내년에도 만들어 보고 싶다.
“우리의 삶은 카오스예요. 매일매일 일어나는 일들에는 그 어떤 의미도, 질서도 없죠. 하지만 거기서 무언가 이야기를 발견하려고 애쓰는 것, 그런 무작위적인 사건에서 어떤 의미나 서사를 발견하려고 애쓰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에요." - <멘탈의 거장들> 중 신디 글레이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