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뇌의 어떤 영역에 정적으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활성화된 프로세스입니다. 그래서 기억을 한 번 읽는 것은 곧 한 번 쓰는 것이 됩니다. 기억은 현재 상황에 비추어 계속 다시 기록됩니다.
최근 기억력이 급격히 떨어진 것 같아서 의사 선생님께 검사를 받아봐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동료와 이야기했던 것을 까먹는 일이 잦아지고, 뭘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돌아서면 잊고 멍해지는 순간도 생겼기 때문이다. 의사 선생님은 혹시 출력이 아니라 입력 문제인 건 아니냐고 물었다. 전에는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입력이 되던 것들이 점점 집중력을 잃으면서 흐릿한 형태가 되고, 그래서 출력에 어려움을 겪게 될 수 있다고 했다. 듣고 보니 어쩌면 입력될 때의 집중력 문제인 것 같았다.
일상에서 기억을 입력하는 방식
왜 이렇게 집중력이 떨어졌을까? 개인적으로는 일터에서 슬랙으로 매일 8시간 이상 인스턴트 메시지로 오고 가는 커뮤니케이션을 10년 가까이 한 영향이 꽤 큰 것 같다. 누군가의 요청에 빠르게 응답하고 반응하게 되는 성격 때문에(카카오톡에 1이 남으면 안 되는 스타일) 이런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에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것 같다. 최근에 일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정말 중요한 정보가 아니라면 깊이 인식하고 생각하는 대신 다음 정보를 받아들이기 위해 얼른 잊고 넘어가곤 했다. 업무를 하며 너무 많은 정보에 노출되기 때문에 계속 하나를 붙잡고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슬랙 메시지를 모니터 한 쪽에 계속 켜두는 방식이 집중력을 떨어트리는 것 같아 모니터를 두 개에서 하나로 줄여보기도 했다. 그치만 결국 5분에 한 번 정도는 화면을 넘겨보고 돌아오는 것 같다.
쉬는 시간에는 인스타그램 같은 SNS로 엄청나게 다양한 콘텐츠를 구경한다. 멈출 수가 없다. 주변 사람들이 어디서 뭘 하고, 먹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각각의 정보를 1초도 안 되는 시간 단위로 보게 된다. 이렇게 일을 할 때도, 쉴 때도 엄청난 양의 컨텍스트 스위칭이 일어나는 걸 보면 어쩌면 집중력이 떨어지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최근 관련한 내용을 다루는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다들 집중력과 주의력이 떨어진다고 호소하는 것을 보면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 같다. 이렇게 집중력을 떨어트리는 라이프 스타일과 이미 삶에 깊이 들어온 도구들을 어떻게 떼어낼 수 있을까? 여러 번 고민해 봤지만 일과 생활을 구성하는 것들과 단번에 멀어지기가 좀 난감하다.
기억의 난감하고, 아름다운 면들
이렇게 기억을 잘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기억하는 일이 난감할 때도 있다.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원치 않게 계속 떠오를 때 그렇다. 괴로운 기억을 잘 잊는다고 생각했는데 언젠가부터 불쾌하거나 속상한 기억이 불쑥 나타나 재생된다. 뇌는 기억하는 내용에 대한 진위 여부나 좋고 나쁨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상황이나 내용에 대해 떠올리는 그 자체로 그 정보가 강화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면 멈추려고 노력한다. 물론 잘 안 될 때가 많다.
한편, 기억한다는 것이 여전히 아름답고 행복할 때도 있다. 내게는 특히 기억이 감각의 차원이 될 때 그렇다. 누구나 전에 무심코 찍어둔 사진을 보면서 그날의 분위기, 동선, 함께 시간을 보낸 얼굴들이 공감각적으로 펼쳐질 때가 있을 것이다. 겨울을 생각하면 차가운 공기의 상쾌함과 시린 손 끝을 떠올리고, 느낀다. 적어둔 일기를 보며 당시의 감정에 휩싸인다. 추억이 많았던 장소에 오랜만에 다시 찾아갔을 때 코가 기억하는 공기의 냄새를 맡으며 놀라움과 행복함, 향수를 느끼기도 한다. 괴롭고 기억하기 싫은 일들이 떠오르는 것도 어쩌면 마음과 감각을 온전히 집중한 시간의 산물인지도 모르겠다.
기억은 단순히 머리에서 일어나는 입출력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함께 움직이며 당시의 환경을 재생하는 일인 것 같다. 더 많은 의미 있는 기억을 스스로에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 봐야겠다. 다시 재생되는 기억도 계속 이어지는 현재만큼이나 내 삶의 한 부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