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는 우리가 세상에 어떤 존재로 머무르고 있는지, 어떻게 존재하고 느끼고 살고 싶은지를 이해하는데 영향을 준다. … 그 순간은 언제나 현재적, 일상적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 하나: 나는 희노애락 대부분을 일하면서 느낀다. 대부분의 사회적 관계도 어느 순간부터 일을 하면서 맺는다. 일을 함께 하면 그 사람의 가장 좋은 모습과 안좋은 모습, 일종의 본질까지 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개인적인 삶에서는 나와 너무도 달라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 종교•가치관•사회적 배경 등이 모두 다른 사람 여럿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일정한 시간에 만나고 진정성 있게 노력한다는 사실을 아직도 놀라워 하기도 한다. 물론 그것이 자본주의의 강력함이겠지만, 그 과정에서 의미있는 관계와 과정을 만들어 냈다면 또 다른 가치가 만들어 진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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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 앙드레 고르는 한 사람이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는데 세 가지 형태의 노동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임금노동입니다. 타인을 위해 노동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형태이지요. 이것을 타율노동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자율노동입니다. 개인의 욕구에 따라 …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돈과 무관한 노동을 말합니다. 세 번째는 자활노동입니다. 생존을 위해 해야 하는 노동인데요. 청소하기, 음식 만들어 먹고 치우기, 잠자리 정리하기 등과 같이 소소하지만 중요한 활동을 말합니다.’ - 희망제작소, ‘노동의 세 가지 형태’
‘일’이 밀도 높은 경험이 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일단 생산하는 가치나 결과물이 있다. 사람이 하는 일의 종류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세 가지가 있지만, 임금 노동 시간이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결과물을 만드는 완결된 경험을 일터 바깥에서 만들기 쉽지 않다. (물론 요즘은 일상, 집에서의 경험도 같이 중시하긴 하지만 임금 노동 시간이 줄어들지 않기 때문에 큰 변화는 없어보인다.) 그리고 그 결과물에서 얻는 성취감이 있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희노애락 대부분은 그걸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겪게 된다. 결과물까지 가는 여정에는 나와 동료가 자연스럽게 투여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지적 리소스와 물리적인 시간, 그리고 사람이기에 복합적인 감정이나 마음이 들어간다. 배움과 성장도 일어난다. 관계가 생기고 지속되거나 마무리된다. 그렇기에 중요한 삶의 공간이 된다.
‘일이 한 사람에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큰 뿌듯함이나 기쁨을 느끼는 순간은 대개 일과 관계되어 있다. 물론 실제로 일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삶의 태도를 배우기도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일은 내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일은 사회 속의 나를 확인하고 인정받는 통로가 된다.’ - 황효진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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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단순히 어떤 결과물을 만드는 게 좋았던 것 같다. 이후에는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깊게 일어나는 지적•감정적 교류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것이 나의 인간됨에 미치는 영향들을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일터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의사결정과 가치판단들, 세상에 실현하려는 가치의 방향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동료들과의 대화에서도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삶을 이루면서 나와 일터의 가치가 크게 불화하면 괴로워지기도 한다. 나를 포함해 많은 여성들이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에서 이야기 하는 것처럼 일과 일터, 삶에 대해 고민하고 의미를 찾는다.
일에 대한 관심만큼이나 살아낸다는 것, 산다는 것, 잘 산다는 것에 대해 자기 추궁적 질문을 멈추지 않으며,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려는 의욕도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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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8년 정도 일을 했다. 돌아보면 좋은 경험들도 있었고 힘들고 어려운 경험도 있었다. 어려운 경험을 할 때는 무척 괴로웠지만, 시간이 지나고 흐릿해질 즈음에는 그런 과정을 ‘성장’처럼 여기기도 했다. 여전히 사회 초년생 때의 나처럼 보이는 동료를 보면 이게 성장인지, 동화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일터의 여성은 일터 내의 주류 문화에 ‘동화’된다. 동화는 조용히 스며드는 과정이다. 임금노동자는 일터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새로운 역할, 임무, 지위 등을 갖게 되고 그때마다 배우고, 순응하고, 마침내 동화된다. 때문에 동화는 일하는 내내 지속하는 사건이다.
일은 계속 가속도를 밟으며 내게 더욱 더 중요해졌다. 다행히 감정을 분리하거나 빠르게 정리하는 능력, 일상으로 돌아오는 능력도 좋아졌다. 쉽게 감정 이입을 하는 스타일이기도 해서 오래 일을 하려면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그래서 안도하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 아주 조금은 씁쓸했다. 이것도 어쩌면 저자가 말하는 ‘동화’의 기술을 스스로 만들어 고도화 한다고 느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